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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0년사
  • 愚岩60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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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암학원의 모태
  • 우암학원(愚岩學園)이 건학 60년을 맞았다.
    한국현대사의 격동기에 탄생한 우암학원은 지난 60년 동안 건실한 교육의 뿌리를 내려 세계로 뻗어가는 명문사학으로 발돋움했다.
    옥과농민고등학원의 천막교실에서 시작해 옥산중학교, 옥과고등학교, 전남과학대학교, 남부대학교 등 중, 고등학교, 전문대학, 4년제 대학교를
    모두 갖춘 대규모 학교법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설립자와 우암인들의 피땀으로 이룩한 우암학원 60년사는 한국현대사와 우리나라 교육발전의 궤적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1945년 해방이후 좌,우 이념대결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취약한 경제 구조 속에서 한국사회는 빈곤의 악순환이었다.
    문맹률 또한 78%에 달했다. 농촌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대를 물린 가난과 가난에서 파생된 무지,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가난, 이 질곡을 벗어 던지기 위해 의기 있는 천년들과 지식인들이 뜻을 모았다.
    옥과 지역에서는 조용기(趙龍沂, 우암학원 설립자), 김성옥(金成玉), 이창원(李昌源)씨 등 세 사람이 주축이 된 농촌계몽운동이 활기 있게 진행됐다.
    농촌계몽반을 만들어 주보 '과학농민'을 발행하고 사랑방 좌담회를 열었다.
    이들 계몽활동의 철학은 삼애정신(三愛精神)이었다.
    '하늘의 도를 공경하며 인간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한다'는 삼애정신은 이 계몽활동이 단순히 일과성 활동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농도(農道)'를 개발해 피폐한 농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초석이었던 것이다.
    설립자 조용기 박사의 종형(從兄)이자 기독교운동가였던 조용택(趙龍澤)전도사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옥과교회 내 목사관에 옥과농민학원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농민교육이 시작된다.
    조용기 박사 등이 주축이 돼 학원에서는 과학영농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농법을 가르치고 서로 협동하는 공동체의식을 북돋았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의 기지였던 옥과교회는 이로써 해방이후에는 재건을 위한 배움터이자 지역공동체 의식을 심는구심점으로 역할 했다.
    이 옥과교회는 이로써 해방이후에는 재건을 위한 배움터이자 지역 공동체의식을 심는 구심점으로 역할 했다.
    이 옥과농민학원(玉果農民學院)이 우암학원의 첫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옥과농민고등학원(玉果農民高等學院)의 모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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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뫼동산의 천막교실
  • 당시 정치, 사회, 경제적인 시대상황은 최악이었지만 청년 지식인들의 고향에 대한 사랑과 서민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가난과 무지의 한을 배움으로 풀려는 소망은 신앙에 가까웠다.
    특히 지역민들은 옥과인(玉果人)으로서 자부심과 '배워야 산다'는 열망이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다.
    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육장소가 부족했다.
    자원봉사 교사들의 손길도 턱없이 달렸다.
    조용기 박사는 재직 중이던 광주 숭일중학교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새로운 배움터를 일구는데 전력하기 위해서였다.
    옥과농민고등학원은 1950년 12월 1일 사설 학술강습소 설치인가를 받아 이듬해 4월 9일 개교 및 입학식을 갖는다.
    조용기 박사가 초대원장으로 취임했다.
    갈뫼동산(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산 85번지, 현 옥산중, 옥과고등학교 부지)에 군용텐트로 만든 두 채의 천막교실에서 우암학원의 본격적인 역사는 시작된다.
    흙 바닥에 거적을 깔고, 판자에 먹물을 칠한 흑판을 썼다.
    또 토막나무를 책상 삼았고 등사기로 교재를 만들어 수업을 했다.
    시설은 열악했지만 교사와 학생들의 열의와 사제간의 정은 뜨거웠다.
    하지만 장마철의 천막교실은 빗물이 흥건하게 흘러 들어 수업 받기가 힘들었다.
    새로운 교실이 필요했고 장마가 끝나자마자 선생님과 제자들은 힘을 합해 흙 벽돌 교실을 지었다.
    오전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나무를 베고 흙 벽돌을 찍어가며 3간 짜리 교실을 완성했다.
    그렇게 피땀으로 지어진 학교에서 향학열을 불탈 수 밖에 없었다.
    3년 과정을 절반으로 단축시켜 고교 입학 자격 검정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응시자 90%가 합격하는 성과를 거뒀다.
    옥과농민고등학원 설립 역시 삼애정신(三愛精神)이 바탕 철학이었다.
    초대 원장에 취임한 조용기 박사는 '도의교육' '협동교육' '직업교육'을 건학 이념으로 정하고 그 실현에 노력을 경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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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과농업고등기술학교
  • 옥과농민고등기술학교의 탄생은 지역민들의 교육적 염원을 실은 것이었다.
    옥과농업고등학원을 운영하면서 서로 공감한 정규교육에 대한 열망이 모아져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옥과농업고등기술학교는 학칙 제 1조에 명시된 교육목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농업기술과학에 관한 전문교육'을 표방했다.
    옥과농업고등기술학교는 '다각적인 영농기술 전수를 통해 모범 농촌 역군의 양성과 이상 농촌 건설에 공헌하고자 한다'는 취지를 갖고 태어났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단지 인재양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구심점으로서 역할도 자임했던 것이다.
    1954년 개교한 옥과농업고등기술학교는 2년제 기술고등학교였다. 농업토목과와 축산과를 설치하고 각 학년과 각 학과 1학급씩 전체 6학급 규모였다.
    교훈은 성실성과 의지, 그리고 실천성을 갖은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 '올바른 사람' '굳건한 사람' '꾸준한 사람'으로 정했고
    창설자의 인생관이자 좌우명인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라'는 학생들의 생활지표가 됐다.
    이 학교의 설립은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학교로서 농업교육의 기반을 제대로 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고등기술학교와 기술학교는 첫 번째 교육지표를 농가에 도움이 되는 과학적 생산기술을 익히는 데 두었다.
    한편 진학희망자에게는 대입검정과 고입시험에 응시할 실력을 길러주기 위해 별도의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농촌공동체와 함께 하는 학교가 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교가 산업기술센터 역할을 하면서 다각적 지역 농업경영에 기술적 측면에서 도움을 주고,
    교사들을 중심으로 학생들과 조를 편성해 마을을 순회하면서 계몽활동과 영농기술 전수에 최선을 다했다.
    옥과농업고등기술학교가 그런 측면에서 옥과면, 경면, 입면, 오산면, 삼기면 일대의 농업경영 근대화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교육내용도 영농의 기초부터 과학영농의 기술, 그리고 첨단영농기술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시대를 앞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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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과농업고등학교
  • 6.25 전화를 딛고 출발한 옥과농업고등기술학교는 지역사회의 교육문화 산업에 있어서 적잖은 공을 세웠지만 이런 시대변화 속에서
    지역민들은 대입자격검정고시를 거쳐야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정규고등학교가 세워지길 기대했다.
    당시 옥과면 옥과리는 전남, 북 양도의 5군 11개면이 인접해 있는 지역이지만 중등 교육기관은 중학교 3개교, 기술학교 1개교에 그치는 형편이었다.
    농촌실정에 맞는 고등학교가 필요했다. 그래서 추진된 것이 옥과농업고등학교다.
    옥과농업고등학교는 66년 12월 19일 설립인가를 받고 67년 농업과 각 학년 1학급, 축산과 각 학년 1학급 등 총 6학급으로 문을 열었다.
    학맥과 교훈은 농업고등기술학교에서 그대로 이어받았다. 교육의 기본방향을 더욱 가다듬어 '유능한 영농인의 육성'이라는 교육의 큰 줄기를 만들었다.
    교육과정을 더욱 세분화 시켜 공통필수, 공통선택, 전문필수, 전문선택으로 나눠 대입진학과 영농전문인 양성의 두 가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암학원의 태상적 소명이 그랬듯이 옥과농업고등학교 역시 지역사회의 발전이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그래서 '향토과제'의 연구와 보급에도 주력했다. 지역의 영농, 축산농가가 봉착한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더 나은 영농축산법을 개발해 보급했던 것이다.
    케이지식 양계, 앙고라 토끼사육, 양배추 재배, 상묘(桑苗)생산 방법의 개선 등이 그 연구의 주목할만한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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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계 전환 옥과고 탄생
  •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도시중심의 인문계 고등학교 선호현상은 두드러졌다.
    이런 흐름 속에 농업고등학교는 축산과 지망생이 서서히 감소해갔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워 도시학교로 유학을 보낼 여력이 안 되는 지역민들은 학교측에 인문과 증설을 바랐다.
    수요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맞춤교육을 염두에 뒀던 학교측은 이 바람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 요구에 따라 1970년 6월 8일 제25차 법인 이사회의가 개최됐고 축산과를 없애고 인문과(보통과)를 설치하는 방안을 논의해 최종 결정했다.
    교명도 '옥과종합고등학교'로 변경키로 하고 전남교육위원회에 이와 같은 내용을 상신했다.
    변경내용이 문교부에서 인가되자 1971년 옥과농업고등학교는 옥과종합고등학교로 바뀌었다.
    옥과고등학교는 시대변화에 따라 많은 변천을 겪으면서도 '올바른 사람' '굳건한 사람' '꾸준한 사람'이라는 교훈을 유지하면서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옥과고등학교는 1974년부터 산학협동체제의 일환으로 곡성군 오산면 연화리 550번지에 세워진 두보실업 주식회사를 '새마을 공장'으로 승인 받았다.
    일하면서 배우는 토대를 닦은 것이다.
    이 공장 여자 근로자를 중심으로 고등학교 정규과정(인문과정)신입생을 모집했다.
    인가 받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지만 야간부 1학급 60명을 인가 받아 1976년 국대 최초로 회사 전 종업원을 학생으로 하는 입학식을 가졌다.
    인문계고등학교로 출발한 이후 옥과고등학교는 학력배양에 최대 목표를 두고 능력별 수업을 추진해 대학입시 대비에 전력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전인교육 역시 중시됐다.
    특별교육과 각종 운동경기 종목의 육성 또한 옥과고등학교 역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복싱부 레슬링부 태권도부 육상부 등이 육성돼 우수한 실력을 과시했고 복싱부는 82년부터 시작돼 실력과 역사를 자랑한다.
    이와 같이 건실한 학교운영은 읍, 면 단위 학교들이 도시화와 함께 급속히 공동화되는 속에서도 옥과고등학교가 건재할 수 있게 한 비결이 됐다.
    면 단위 학교로는 드물게 옥과고등학교가 평균 21학급을 유지해 온 것은 학교에 대한 지역민들의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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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산중학교 - 시련 딛고 성장
  • 경제성장과 더불어 초등학교 졸업자들의 중학교 진학률이 서서히 높아져갔다.
    69년도 진학률이 61.8%였던 것이 70년도에는 66.1%로 성장해 기존 중학교만으로는 교육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옥산(玉山)중학교는 1969년 10월 14일자로 문교부인가를 받아 설립이 추진됐다.
    하지만 추진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난다. 1970년 3월 5일 마침내 우여곡절을 겪고 옥산중학교 제 1회 신입생 입학식을 가졌다.
    옥산중학교는 굳건하고 꾸준한 사람, 민주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을 만들어 가는데 학교교육의 기본방향을 두고 기초학력 정착에 힘을 쏟았다.
    농촌 중학교였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와 연구는 도시학교에 뒤지지 않았다.
    시청각자료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실험과 실습교육에 주력했다.
    1985년도부터는 특별활동에 컴퓨터반을 설치해 시대를 앞서가는 인재를 기르기 위해 질 높은 교육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교한 이후 30년의 역사 속에서 옥산중학교는 국가의 시대적 교육목표를 실현하면서 작지만 실속 있는 지역학교로 성장해왔다.
    옥산중학교는 특별교육활동과 시청각교육, 프로그램학습 등에 주력했다.
    특별활동은 옥산중학교가 개교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한 교육으로 학급을 통해 공동체 의식과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민주시민의 자질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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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과학대학교 - 학원사의 새 지명
  •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암학원은 학원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대학교육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역사를 쓰게 된 것이다.
    또 재단법인 옥과농도숙은 1998년 설립자의 철학을 담아 법인 이름을 우암학원으로 바꾸고 웅대한 21세기의 도약을 꿈꾸게된다.
    대학교육의 첫 출발은 1990년 12월 19일 탄생한 정선실업전문대학(正善實業專門大學)은 1994년 전남전문대학(全南專門大學)으로
    교명을 바꾸고 1998년에는 전남과학대학교(全南科學大學校)로 탈바꿈하게 된다.
    정선실업전문대 설립으로 우암학원의 건학이념 중 하나인 '직업교육'의 효율적 실행이 가능해졌다.
    또 고등교육으로부터 소외된 농촌지역에 바람직한 교육환경을 만들겠다는 뜻도 실현이 됐다.
    이처럼 전문대학을 설립하게 됨으로써 우암학원은 사학(私學)의 토대를 한층 굳건히 다졌다.
    교육시설들이 도시로만 집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면(面)지역에 전문대학이 들어선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정선실업전문대의 교육방향 중 주목할 만한 또 하나는 '여성교육' 여성, 특히 어머니 교육은 교육의 기초이고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초석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이 설립자의 철학이었다.
    여성교육에 대한 신념은 전문대학 설립 시 제 1호 학과로 가정과를 만들게 했고 지금가지 5개의 여성관련학과가 만들어졌다.
    또 전문대학으로는 전국 최초로 1999년 여자축구단을 창설해 진취적인 여성교육기관으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무엇보다 대학고유의 특성화와 차별화 된 교육프로그램을 도입, 전문대학으로서 국제적인 자생력을 갖춘 것이 전남과학대학교의 특징이다.
    자동차 기계 계열학과와 자동차 기계연구소가 중심이 돼 산(産), 학(學), 연(硏)의 복합 실습공단이 설치됐고 중국요년사범대학 등
    해외 대학간의 교류를 통해 국제화 대학으로서 면모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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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부대학교 - 미래형 첨단대학
  • 남부대학교(南部大學校)는 우암학원이 21세기에 내민 출사표다.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전문인력을 키워내는 산실로서 교육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남부대학교는 1999년 3월 12일 광주시 광산구 첨단단지 내에 개교한 후 새 천년의 도약을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초대총장엔 김용선(金龍善)박사가 임명됐다.
    김총장은 교육이론과 교육행정에 밝은 교육전문가,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장 등을 지내고 현재 전남대학교 사범대 교육학과 명예교수인 교육원로다.
    21세기를 앞두고 1999년 교육부가 발표한 '교육발전 5개년 계획'은 '21세기 지식기반 사회를 대비할 차세대 고급인력의 집중육성'이란 목표를 세웠고
    남부대학교는 그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교육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특성화대학을 지향하는 남부대학교는 1999년 최첨단기계 기술인력과 지식정보인력 양성을 위해 자동차기계공학부와 컴퓨터전자공학부를 설치했고

    1백명을 정원으로 신입생을 모집했다. 적은 규모의 학생정원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여건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남부대학교가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넉넉한 교육여건과 효율적 교육시스템이다.
    교수 1인당 학생 10명꼴로 전국 최저비율의 교수, 학생 비율을 실현했고 프로젝트 연구, 실습, 이론 강의 등을 동시에 진행하는 섹션수업으로
    현장과 이론의 능력을 두루 갖춘 전문인력을 키워내고 있다.
    또 철저한 산학연계 시스템과 벤처동아리의 육성, 신기술 프로젝트에 대한 적극적 투자, 외국대학교 자매결연 및 협약을 추진 '작지만 강한 대학'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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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세기를 향해
  • 건학 반세기를 맞이한 우암학원은 60년의 세월동안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군용텐트를 이용해 만든 초라한 천막교실은 21세기를 상징하는 첨단의 웅장한 대학건물로 변했고 사설 강습소는 중, 고, 전문대, 4년제 대학을 갖춘 명실상부한 명문사학으로 성장했다.
    교육내용도 농업과 축산업 중심에서 산업역군, 첨단역군을 길러내는 내용으로 달라졌고 교육의 질과 교수진의 수준도 놀라울 정도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고 할 수 있다.
    가난에 고통받으면서도 천막교실에서 향학열에 불탔던 소년 소녀들은 한국사회를 지탱해가는 장년, 원로가 됐고 그의 아들, 딸, 그리고 손자들이 다시 우암학원의 학생이 돼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가히 상전벽해의 세월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도의교육, 협동교육, 직업교육의 건학이념. 그 건학이념은 우암학원이 변화의 길을 걸을 때마다 그 변화를 추동하고 이끌어온 힘이었고 중심을 잡아주는 기둥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서 시대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참다운 인재를 간당(間斷)없이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암학원은 새로운 세기와 세계 무대를 향해 의욕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전남과학대학교는 장, 단기 발전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우수교수확보, 다 전공 교수초빙 등 고급두뇌인력 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학교시설의 첨단화와 대학행정의 100% 전산화 등 효율적 교육 토대를 마련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 사회교육프로그램과 산학연계를 강화해 더욱 열린 대학으로 성장하겠다는 각오다.
    남부대학교는 시대에 맞는 학교발전모형을 구상, 장단기 발전계획에 따라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산업 중심 대학으로 발돋움해 갈 계획이다.
    지난 반세기는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격동의 세월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반세기의 격동은 그 어떤 시대보다 치열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예견한다.
    그래서 더욱 교육의 책임이 절실해진다.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들을 키워온 우암학원은 이제 세계가 원하는 세계적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학원의 몸피를 키우고 교육적 토대를 닦았다면 다가오는 반세기에는 세계를 무대로 도약을 준비해 갈 것이다.
    우암학원은 새로운 반세기를 더해 엮어질 웅대한 '백년사'를 꿈꾸면서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성실함으로 교육현장에 임할 것을 새롭게 다짐해 본다.